AI 챗봇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 있으신가요?
요즘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닙니다. 특히 좋아하는 캐릭터와 수다를 떨듯 대화하는 '캐릭터챗'이 큰 인기예요. 와이즈앱·리테일 조사에 따르면, 2026년 2월 한국인 스마트폰 사용자가 가장 오래 쓴 AI 챗봇 앱이 캐릭터 대화 서비스 '제타'였습니다. 한 달 사용 시간이 약 1억 1,341만 시간에 달했죠. 이용자 수는 챗GPT(2,293만 명)가 제타(402만 명)보다 훨씬 많은데도, 사람들을 더 오래 붙들어 둔 쪽은 제타였던 겁니다.
사실 저도 AI와의 대화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은 적이 있어요. 마음이 편치 않던 시기에 동료가 "템플스테이는 못 가더라도 이거라도 해 보라"며 '석가머니'라는 앱을 알려 줬거든요. 음악에 맞춰 목탁을 치고, 염주를 돌리고, 만보기로 '수행'을 하고, 소원을 빌면서 다른 사람의 소원까지 구경할 수 있는 힐링 앱입니다.
그러다 얼마 전 이 앱에 AI 채팅이 생겼어요. 재미 삼아 AI 봇 '햄스님'과 대화를 시작했는데, 생각지 못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상대가 AI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풀리는 게 신기했어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왜 기계와의 대화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쓰고, 때로는 위로까지 받을까요? 놀랍게도 이 질문은 AI가 지금처럼 똑똑해지기 훨씬 전, 무려 60년 전에 이미 한 번 던져졌습니다.
1966년에 등장한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ELIZA(일라이자)’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그 허술함 덕분에 오히려 오늘의 AI를 생각하는 데 아주 좋은 질문을 남겼어요. 캐릭터챗에 푹 빠진 지금, 최초의 챗봇으로 꼽히는 ELIZA의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1966년, MIT에서 태어난 대화 프로그램
ELIZA는 MIT의 컴퓨터 과학자 조지프 바이첸바움(Joseph Weizenbaum)이 만들어 1966년 1월 학술지 『Communications of the ACM』에 소개한 프로그램입니다. 사람이 키보드로 문장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문장으로 답하는, 이른바 자연어 대화 프로그램이었죠.
이름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에 나오는 주인공 일라이자 둘리틀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거리의 꽃 파는 아가씨가 말투를 배워 귀부인처럼 말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프로그램도 새 규칙(스크립트)을 얹을수록 점점 다르게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는 거죠.
ELIZA에는 여러 스크립트를 얹을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해진 것이 DOCTOR입니다. 심리 상담사처럼 대화하는 스크립트예요.
이런 대화가 오갔어요
논문에 실린 유명한 대화의 앞부분은 대략 이렇게 흘러갑니다(번역·요약).
화자 | 발화 |
|---|---|
사용자 |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
ELIZA | 어떤 점에서요? |
사용자 | 늘 이런저런 일로 우리를 귀찮게 하잖아요. |
ELIZA | 구체적인 예를 떠올릴 수 있나요? |
사용자 | 음, 남자 친구가 저를 여기 오게 했어요. |
ELIZA | 남자 친구가 당신을 여기 오게 했군요. |
사용자 | 제가 대부분 우울해 보인대요. |
ELIZA | 당신이 우울하다니 안타깝네요. |
처음 보면 꽤 그럴듯하죠? 하지만 ELIZA는 이 대화에서 '남자 친구'가 누군지, '우울'이 어떤 기분인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비결은 '알아듣기'가 아니라 '바꿔 말하기'
ELIZA의 원리는 놀랄 만큼 단순합니다.
입력된 문장에서 키워드를 찾습니다. (예: '엄마', '우울', '남자 친구')
문장을 미리 정해 둔 규칙대로 조각으로 나눕니다.
조각을 정해진 틀에 끼워 맞춰 질문으로 되돌려 줍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참 도움이 되네요"라는 말을 받으면 '나'와 '당신'을 뒤집어서 "무엇 때문에 제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같은 문장을 만드는 식이에요. 키워드가 하나도 없으면 "계속 말씀해 보세요" 같은 만능 대꾸를 하거나, 앞서 나온 말을 꺼내서 다시 묻기도 했습니다.
의미를 이해하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저 말을 받아서 모양만 바꿔 되돌려 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왜 하필 심리 상담사였을까요
바이첸바움이 상담사 역할을 고른 건 치료가 목적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역할이 기술적으로 편했기 때문입니다.
상담에서는 듣는 쪽이 "그렇군요, 더 말해 주세요" 하며 세상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척해도 어색하지 않아요. 덕분에 프로그램에 세상 지식을 잔뜩 넣지 않아도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던 거죠. 게다가 상대가 말을 아낄수록, 말하는 사람은 그 빈자리를 자기 사정과 감정으로 채워 가며 이야기하게 됩니다. 상대의 말을 되받아 주는 역할이라는 점이 컴퓨터의 한계를 가려 준 셈입니다.
이 역할의 바탕에는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 상담이 있었어요. 상대의 말을 자기 말로 되돌려 주며 듣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반영적 경청'이라는 기법이죠. 다만 실제 상담은 말에 담긴 감정까지 헤아리는 과정이 함께하는데, ELIZA는 그 겉모양만 본뜬 셈입니다.
사람들은 ELIZA에게 속마음을 털어놨어요
그런데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ELIZA가 자기 말을 이해한다고 믿고, 속마음까지 털어놓는 사람이 나온 거예요. 바이첸바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비서가 ELIZA와 몇 마디 나누다가 자리를 비켜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바이첸바움은 이 반응에 큰 충격을 받았고, 훗날 아주 단순한 프로그램과의 짧은 대화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믿음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썼습니다. 이 고민은 1976년 책 『컴퓨터의 힘과 인간의 이성(Computer Power and Human Reason)』으로 이어졌어요.
이렇게 컴퓨터 프로그램에 이해력이나 공감 같은 사람다움을 덧씌워 보는 경향을 지금은 ELIZA 효과라고 부릅니다.
심리학에는 '지각된 반응성(Perceived Partner Responsiveness)'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존중해 준다고 내가 느끼는 정도를 말하는데, 이 느낌은 상대가 실제로 얼마나 이해했는지와는 별개로 생기기도 합니다. ELIZA는 말을 되받아 주고 질문을 이어 갔을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 반응을 관심의 신호로 읽었을 수 있어요.
사라졌던 원본 코드가 60년 만에 돌아왔어요
ELIZA는 워낙 유명했지만, 정작 원본 코드는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널리 퍼진 건 논문 설명을 바탕으로 다시 만든 버전들이었어요.
그러다 2021년, 연구자들이 MIT에 보관된 바이첸바움의 자료에서 ELIZA 원본 출력물과 거의 완전한 코드를 찾아냈습니다. 2025년에는 이 코드를 당시 컴퓨터 환경(옛 시분할 시스템 CTSS를 IBM 7094라는 옛 컴퓨터의 에뮬레이터 위에서 돌리는 방식)에서 다시 실행했다는 논문이 나왔어요. 1966년의 챗봇이 60년 만에 원래 모습으로 되살아난 겁니다.
2023년, ELIZA가 GPT-3.5와 엇비슷했다고요?
흥미로운 후일담이 하나 더 있어요. 2023년 한 연구팀이 사람들에게 "지금 대화하는 상대가 사람인지 AI인지" 맞히게 하는 튜링 테스트 실험을 했습니다. 상대는 사람, GPT-4, GPT-3.5, 그리고 ELIZA였어요.
2024년 NAACL 학회에 실린 논문의 결과는 이랬습니다.
상대 | 사람이라고 판단된 비율 |
|---|---|
사람 | 66% |
GPT-4 (가장 좋은 설정) | 49.7% |
ELIZA | 22% |
GPT-3.5 | 20% |
1966년 프로그램이 GPT-3.5와 비슷하거나 조금 앞선 수치예요. 물론 ELIZA가 더 똑똑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연구진은 사람들이 판단할 때 지능보다 말투(35%)와 감정적인 특성(27%)을 주로 근거로 삼았다고 밝혔어요. 지능만으로는 사람처럼 보이기에 부족하다는 뜻이죠.
60년 전 ELIZA에게 배우는 AI 상담의 조건
지금의 AI 챗봇은 ELIZA와 차원이 달라요. 정해진 규칙에 끼워 맞추지 않고, 방대한 글을 학습해서 문맥에 맞는 문장을 직접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ELIZA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해요.
잘 들어주는 느낌과 정확히 아는 것은 다릅니다. 말투가 자연스럽고 이해받는 것 같아도 내용까지 맞는 건 아니에요.
그럴듯함은 쉽게 믿음이 됩니다. 사람은 상대가 기계라는 걸 알아도 말이 통하면 마음을 열곤 해요. 사람이 컴퓨터를 사회적 존재처럼 대한다는 'CASA(Computers Are Social Actors)' 연구도 있어요. AI에게 인사를 건네고, 답이 마음에 들면 "고마워요" 하고 말해 본 적,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고객 상담에서는 그럴듯함만으로 부족합니다. 주문, 결제, 환불처럼 정확해야 하는 질문에는 근거가 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답해야 하고, 해결이 어려우면 상담사에게 넘길 수 있어야 해요.
ELIZA가 보여 준 건 "대화처럼 보이는 것"을 만드는 일이 의외로 쉽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건 그 뒤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대화를 만드는 일이죠.
말을 되받아 주는 일의 힘
돌아보면 ELIZA가 한 일은 사용자의 말을 되받아 주는 것뿐이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기서 위로를 느꼈습니다. 위로를 주는 건 상대의 이해력만이 아니라, 이해받고 있다는 감각일지도 몰라요.
지금의 AI 상담도 같은 질문 위에 서 있습니다. 잘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해, 정확하게 답하고, 필요할 때 사람에게 이어 주는 것까지요. 60년 전 작은 프로그램이 남긴 숙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오늘의 한 줄 정리
ELIZA는 한 줄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이해받는다고 느꼈고,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AI 상담의 핵심 과제예요.
참고 자료
Joseph Weizenbaum, "ELIZA—A Computer Program for the Study of Natural Language Communication between Man and Machine", Communications of the ACM 9(1), 1966, pp. 36–45.
Joseph Weizenbaum, Computer Power and Human Reason: From Judgment to Calculation, W. H. Freeman, 1976.
Wikipedia, "ELIZA" (작동 원리, 명칭 유래, 일화 정리용 보조 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ELIZA
Wikipedia, "ELIZA effect" (보조 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ELIZA_effect
IEEE Spectrum, "The First Chatbot's Multiple Personalities". https://spectrum.ieee.org/eliza-chatbot-source-code
Lane, Hay, Schwarz, Berry, Shrager, "ELIZA Reanimated: The world's first chatbot restored on the world's first time sharing system", arXiv, 2025. https://arxiv.org/abs/2501.06707
Gizmodo, "Scientists have resurrected ELIZA, the world's first chatbot", 2025.1.17 (원본 코드 발견·복원 보도). https://gizmodo.com/scientists-have-resurrected-eliza-the-worlds-first-chatbot-2000551947
파이낸셜뉴스, 「AI 챗봇 앱 사용시간 1위 제타…」, 2026.3.10 (와이즈앱·리테일 2026년 2월 조사). https://www.fnnews.com/news/202603101346015565
Jones & Bergen, "Does GPT-4 Pass the Turing Test?", Proceedings of NAACL 2024, pp. 5183–5210. https://aclanthology.org/2024.naacl-long.290
Reis, H. T., Clark, M. S., & Holmes, J. G., "Perceived partner responsiveness as an organizing construct in the study of intimacy and closeness", in D. J. Mashek & A. Aron (Eds.), Handbook of Closeness and Intimacy, Lawrence Erlbaum Associates, 2004.
Nass, C., Steuer, J., & Tauber, E. R., "Computers are social actors", Proceedings of CHI '94, ACM,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