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중동 #2] 금빛 장막 너머 반짝이는 사우디의 심장, 리야드(Riyadh)
사막 위 도시
두바이에서 2시간 남짓을 날아 아라비아 반도의 중앙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수속을 마치고 나오며 문득 걱정이 밀려왔다. ‘사우디는 여전히 보수적이라는데, 샌들을 신어도 될까? 목덜미나 발가락이 보여도 괜찮은 걸까?'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지만, 스카프를 부랴부랴 어깨와 머리에 둘렀다.
하지만 택시를 타기 위해 출입문 밖으로 나선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진짜 극복하고 싸워야 할 대상은 규율이 아니라 오직 '날씨' 하나뿐이었다. 지평선 너머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오후 6시. 섭씨 43도를 기록했다. 스카프로 코와 입을 막지 않으면 숨을 쉬기 힘들 만큼 뜨거운 불한증막 사우나의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사막 위 도시라 그런지 습도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끈적한 더위와는 완전히 다른, 마치 거대한 산업용 히터 바람을 정면에서 맞는듯한 순수한 건식 폭염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피부를 가리기 위해 둘렀던 스카프 안쪽으로 사락사락 바람이 통하며 오히려 묘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온몸을 가리는 현지인들의 복장이 왜 발전했는지 다시 한 번 피부로 납득한 순간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교외 풍경은 마천루가 즐비했던 두바이와 사뭇 달랐다. 모래와 흙으로 빚어낸 듯한 낮은 베이지색 건물들이 우아하게 이어졌다. 오직 사막 위에서만 볼 수 있는 고요한 매력이 창밖을 채우고 있었다.
생강 맛 커피
리야드에서의 첫 저녁,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파트너사 주재원분들의 초대로 사우디 전통 양식 식당인 '나즈드 빌리지(Najd Village)'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우디 중부 나지드(Najd) 지방의 전통 건축 양식을 재현한 공간이 펼쳐졌다. 두꺼운 황토빛 진흙 벽과 붉은 카펫, 예스러운 소품들이 특유의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건물 중앙에 조성된 중정(Central Courtyard) 구조였다. 식당 한가운데에는 초록빛 잔디가 깔려 있었고, 그사이로 키 작은 나무들이 아기자기하게 심어져 있어 마치 사막 속 오아시스를 실내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 중정을 중심으로 빙 둘러 식사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어, 자연과 전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시각적 즐거움이 상당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식사 전 웰컴 드링크로 대접받은 '사우디 커피(Qahwa)'와 '대추야자(Dates)'였다. 사우디 커피는 우리가 흔히 마시는 고동색 아메리카노와는 완전히 다르다. 원두를 아주 살짝만 볶고 사프란을 넣어 황금빛 노란색을 띤 맑은 차에 가까운데, 은은한 한약재와 생강, 알싸한 카다몸 향이 짙게 풍긴다.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간을 전혀 하지 않은 한방 삼계탕 국물에 생강을 진하게 우려 마시는 맛이랄까? 마실 때도 조심해야 하는데, 아주 뜨거운 물로 펄펄 끓여 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곁들여 나온 대추야자도 말린 것이 아닌 생 대추야자였다. 한 입 베어 문 순간, 아뿔싸 설익은 단감을 먹었을 때처럼 혀끝을 감싸는 강력한 떫은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가 잘 아는 말린 대추야자는 쫀득하고 달콤한 반면 연노랑 빛의 생 대추야자는 아삭하게 씹히고 떫다. 다행히 곧바로 들이켠 커피가 입을 개운하게 하고 속을 훈훈하게 데워주었다.
(생 대추야자와의 첫 만남과 달리, 이후 맛보게 된 말린 대추야자에는 완벽하게 입덕하고 말았다. 매일 아침 호텔 로비에 비치된 대추야자를 에너지바처럼 하나씩 챙겨 먹으며 활력을 얻었고, 결국 한국에 돌아올 때도 캐리어 한가득 구매해왔다.)
곧이어 음식이 차려졌다. 바닥에 짚으로 만든 둥글고 널따란 쟁반을 깔고 음식을 올려 먹는 사우디의 전통 방식이다. 화려한 붉은 카펫 위에 편하게 둘러앉아 밥과 고기, 각종 채소 소스를 나눠 먹는데, 이 이국적인 차림새와 맛이 의외로 입에 착착 붙었다.
첫날 저녁부터 현지 음식과 독특한 분위기에 완벽히 매료된 우리 출장 삼총사는, 앞으로 펼쳐질 긴 일정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며 끈끈한 전우애(?)를 다졌다.
🕌🐪[중동 상식 한 조각] 우리가 알던 그 맛이 아니다? '사우디 커피(Saudi Coffee)'
흔히 '아라빅 커피(Qahwa)'로 통용되는 중동의 전통 커피는 카다몸, 사프란 등 다양한 향신료를 넣고 끓여 마시는 독특한 문화다. 그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스타일은 원두를 아주 연하게 볶아 맑은 황금빛 노란색을 띤다.첫 맛은 알싸하고 낯설지만 속을 따뜻하게 풀어주며, 손님을 환대할 때 달콤한 대추야자(Dates)를 함께 내어놓는 것이 이들의 오랜 전통 예법이다. 보기엔 연한 차 같아도 약배전 원두를 오랫동안 끓여내기 때문에 생각보다 카페인이 꽤 강하고 짙은 향신료의 여운이 묘한 매력을 남긴다.
밤 12시의 변신
'현지 적응에 진심'인 출장 트리오가 그냥 잠들 리 없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 아랍어가 유창한 파트너사 직원분과 동행해 시장으로 향했다. 아주 전통 시장은 아니었고, 동대문 도매시장 느낌이 나는 종합 시장이었다. 사우디에 왔으니 전통 의상 하나쯤은 기념으로 사야 하지 않겠냐며 나선 길. 그리고 마침내 우리 출장 트리오의 대장, 알비가 완벽한 현지인으로 변신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와이셔츠 같은 전통 의상 '토브(Thobe)', 머리에 쓰는 붉은 체크무늬 '셰마그(Shemagh)', 그리고 이걸 고정하는 검은색 원형 머리띠 '아갈(Igal/Agal)'까지 풀세트로 착용 완료! 선크림을 무시하고 검붉게 타버린 피부에 이국적인 외모, 180cm가 훌쩍 넘는 풍채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사우디 현지인 그 자체'였다.
밤길에 비단옷을 입고 걷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다지만, 한밤중 사우디 거리에서 이 옷을 입고 나서자 반응이 터졌다. 지나가던 현지 아저씨들은 물론, 검은 아바야를 입은 아주머니들까지 엄지를 척 들며 환호해 주었다.
사실 의상을 구매하기 전까지만 해도 문화적 무례로 보이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우리는 자신들의 문화를 기꺼이 즐기고 존중하는 반가운 손님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현지인들의 따뜻한 시선 덕분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알비는 내가 아바야와 스카프를 고르며 쇼핑하는 내내 그 착장을 유지했고, 결국 호텔 로비까지 무사히 입고 귀가했다. (물론… 이후로 그 옷을 입은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
유제품의 나라
다음 날 아침, 밤늦게까지 잘 먹고 잘 걸어 다닌 탓에 퉁퉁 부은 얼굴로 조식을 먹으러 갔다. 더운 기후와 전통 유목 배경 덕분에 중동은 유제품 문화가 발달해 있다. 처음 맛 보는 수십 가지의 치즈들과 다양한 종류의 요거트, 고소함이 남다른 우유까지. 그중에서도 단번에 내 입맛을 사로잡은 건 '라브네(Labneh)'였다.
라브네는 그릭요거트의 수분을 빼내 소금을 살짝 더한 듯한 농축 요거트 치즈다. 식당마다 고소함과 부드러움의 차이가 있어 비교하며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 끼니 담백한 아랍 빵(피타)에 라브네나 병아리콩으로 만든 후무스를 듬뿍 얹어 먹었는데, 그 감칠맛이 입에 잘 맞았는지 김치 없이는 못 사는 지독한 한식파인 내가 출장 열흘 동안 한국 음식 생각을 싹 잊었을 정도다.
심지어 우리가 머문 호텔은 '산유국의 환대'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컨퍼런스룸에 둘러싸인 중정 공간에는 각종 고급 디저트와 빵, 다양한 차와 커피, 고소한 우유가 상시 마련되어 있어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매일 아침과 낮을 가리지 않고 훌륭한 디저트와 발효 식품을 챙겨 먹다 보니, 사우디에 와서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훨씬 건강하게 삼시 세끼를 챙겨 먹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주말과 빅맥지수
사실 이날(금요일) 오후에는 화상 미팅이 하나 잡혀 있었다. 그런데 미팅 시간이 다 되어가도 상대방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우디의 주말은 우리나라와 달리 '금요일과 토요일'이고, 일요일부터 한 주가 시작되는 체계였다. 현지의 주말이 시작되었으니 연락이 안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후 일정이 통째로 붕 뜨면서, 우리는 뜻밖에 생긴 자유시간을 활용해 쇼핑몰 탐방을 가보기로 했다. 동료들 선물도 구경하고, 현지 소매점의 주문 시스템이나 소규모 상점들의 영업 방식을 직접 부딪쳐보며 관찰하자는 출장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두바이나 리야드를 돌아다니며 가장 먼저 체감한 건 높은 물가였다.
맥도날드 키오스크에서 확인한 사우디의 '빅맥 단품' 가격은 18리얄(SR 18.00), 한화로 7,200원(당시 환율 1SR=400원 기준) 정도였다. 내가 시킨 '스파이시 그랜드 치킨버거'는 단품만 24리얄(약 9,600원), 세트로 하면 12,000원이 훌쩍 넘었다. 물론 버거 크기가 큼직하긴 했지만, 체감 외식 물가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수많은 이주 노동자가 살아가는데, 이런 글로벌 프랜차이즈 물가를 다들 어떻게 감당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비싼 패스트푸드 대신,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 저렴한 고기 샌드위치 '샤와르마(Shawarma)'나 아랍식 닭고기 덮밥 '캅사(Kabsa)' 같은 가성비 현지식을 주로 찾지 않을까 싶다.
🕌🐪[중동 상식 한 조각] 사우디의 주말은 금요일과 토요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의 합동 예배일(Jumu'ah)인 금요일이 주말의 시작이다. 따라서 '금·토'가 휴일이며, 한 주가 시작되는 첫 영업일은 일요일이다. 과거에는 '목·금'이 휴무였으나 2013년에 글로벌 시장과의 소통을 위해 금·토로 개편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경우 지난 2022년 글로벌 비즈니스 표준에 맞춰 주말을 '토·일(금요일 반일 근무)'로 전환했다. 사우디 역시 경제 개혁을 추진하며 글로벌 기업들과의 호흡을 위해 주말을 토·일로 변경하자는 논의가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다.
이처럼 국가마다 주말 제도가 다르고 변하고 있으므로, 중동 출장이나 비즈니스 미팅을 잡을 때는 해당 국가의 현재 주말 형태를 반드시 사전 체크하는 것이 필수다.
반짝이는 삶
이어서 찾아간 두 번째 럭셔리 쇼핑몰은 그야말로 명품 천국이었다. 한 잔에 12,000원이나 하는 고오급 커피 매장을 비롯해 금빛으로 둘러싸인 화려한 브랜드숍들이 즐비했고, 밤 8시가 넘어가자 주말 밤을 즐기러 나온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가장 신선했던 풍경은 술 문화가 없는 이 나라만의 독특한 카페 모습이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성인 남성 7~8명이 동그란 테이블에 모여 앉아 차와 음식을 나누며 서너 시간씩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유흥이 아닌 '대화'로 밤을 채우는 이들의 유쾌한 건전함이라니!
그리고 사우디에 대해 가졌던 가장 큰 편견, "여성들은 외출도 못 하고 억압받는다?"
적어도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2026년의 리야드는 전혀 달랐다. 남녀가 자유롭게 교류했고, 여성들끼리 밤 외출을 나와 명품과 화장품, 화려한 주얼리를 쇼핑하고 있었다.
여전히 대다수가 검은 아바야를 입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만 쓰고 캐주얼하게 입거나 화려한 문양의 아바야를 걸친 사람들도 많았다. 사우디의 살벌한 날씨를 경험해 보니, 오히려 통풍 잘되고 가벼운 아바야야말로 이 동네 최고의 착장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단정한 아바야 차림으로 자유롭게 쇼핑과 여가를 즐기며, 가족, 친구들과 함께 웃음꽃을 피우는 이들의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어둡고 극단적인 프레임과 달리, 사막 한가운데의 이 도시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활기찬 일상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내가 참 작은 세상만 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스치듯 바라보는 이방인의 시선이나 짧은 잣대로 이들의 삶과 문화를 감히 평가하고 단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 그들에게도 이곳은 저마다의 희로애락이 숨 쉬는 소중한 터전이자,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소소하고 따뜻한 일상이 흐르는 삶의 현장이었다.
긴팔과 긴바지를 답답하게 챙겨 입은 우리 이방인들을 향해 그들이 보낸 것 역시 경계가 아닌 따뜻한 미소와 친절뿐이었다.
비하인드 더 씬
이튿날, 리야드를 떠나 해안 도시 '알코바르(Al Khobar)'로 향하기 전, 전(前) 한인 회장님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70년대 중동 건설 열풍 때 사우디에 정착하셨다는 삶의 모험담을 들으며, 밤새 눈으로 확인했던 사우디의 변화들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현지 생활과 문화에 대한 깨알 같은 비하인드 팁들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왕세자의 인기와 파격 개혁: 석유 황금시대 이후 사우디가 글로벌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약 7~8년 전부터 파격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의 복장과 행동을 감시하던 '종교경찰(무타와)'의 권한을 박탈하면서, 변화를 체감한 젊은 층과 여성들 사이에서 왕세자의 인기가 절대적이라고.
사우디인의 뜻밖의 던킨(DUNKIN) 사랑: 한국에서는 주로 도넛 집으로 통하지만, 사우디에서는 가성비 뛰어난 데일리 커피숍에 가깝다. 음주 문화가 없어 카페가 밤늦게까지 아지트 역할을 하는 사우디 특성상, 늦은 밤에도 대용량 아이스 커피를 들고 수다를 떨 수 있는 곳이 던킨인 셈이다. 800개가 넘는 매장이 있고, 더운 날씨 때문에 차에서 내리지 않고 커피를 사 가는 드라이브스루(Drive-Thru)의 인기도 어마어마하다.
스킨십과 악수 예절: 이슬람 문화권이라 기본적으로 이성 간의 직접적인 악수는 피하는 편이다. 보통 남성끼리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이성 간에는 눈인사나 가벼운 목례를 한다. 무슬림이 아닌 외국인 여성에게는 다소 유연한 편인데, 현지 남성들이 실례가 되지 않도록 먼저 악수해도 되는지 친절하게 의사를 물어보고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젠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형과 수질의 비밀: 리야드는 해발고도가 높은 고지대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길고 긴 내리막길을 타게 된다. 또 물의 대부분이 해수 담수화라 수질이 좋은 편은 아니다. (실제로 바닷가에 위치한 식당 화장실을 이용해보면 수돗물에서 짭조름한 맛이 나기도 한다. 한국에 돌아와 머리를 감으니 머릿결이 물미역처럼 차분해지는 걸 보고 수질 차이를 실감했다.)
사막 너머…사막?
화려했던 리야드의 밤과 따뜻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렌터카를 빌려 다음 여정인 알코바르(Al Khobar)로 향했다.
하지만 사막의 시원하게 뚫린 직진 도로만 생각했던 우리에게… 차를 몰고 나선 사우디의 도로는 또 다른 '운전 잔혹사'의 시작이었으니.
파란만장했던 알코바르 운전 잔혹사는 3부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