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중동 #3] 붉은 사막의 위기와 이국적인 해안 도시 알코바르
알코바르 가는 길
짧은 일정이었지만 주말을 활용해 사우디의 다양하고 색다른 얼굴을 보고 싶었던 우리 출장 트리오는 리야드를 떠나 동부의 해안 도시 '알코바르(Al Khobar)'로 향했다.
원래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알코바르는 1938년 인근 담맘(Dammam) 지역에서 석유가 터지며 사우디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상징적인 곳이다. 이후 바로 옆 도시인 다란(Dhahran)에 위치한 세계 최대 석유 기업 '사우디 아람코(Aramco)'의 배후 도시이자, 동부 해안을 대표하는 트렌디한 부자 도시로 성장했다.
마치 미국의 해변 휴양지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감성을 품고 있다고 해서, 출발 전부터 우리 트리오의 기대감은 꽤나 커져 있었다.
🕌🐪 [중동 상식 한 조각] 알코바르의 '알(Al)'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지명에 자주 붙는 '알(Al)'은 영어의 정관사 'The' 역할을 한다. (예: Al Khobar) 한편, 사람 이름이나 가문명 앞에 붙는 '알(Aal)'은 표기는 비슷하지만 아랍어 철자가 다른 단어로, '~ 가문(House of)'을 뜻한다.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명 자체가 '사우드 가문의 아라비아'라는 뜻일 정도로 사우드 가문이 통치하는 왕정 국가인데,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의 이름에 들어간 '빈(Bin)'은 '~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살만 왕의 아들 무함마드'라는 의미다. 그의 풀네임은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사우드 가문의 살만 왕의 아들 무함마드)가 된다.
왕정 국가답게 성씨나 가문명만 들어도 신분과 집안을 추측할 수 있으며, 실제로 주요 핵심 요직 대부분은 사우드 왕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리야드에서 알코바르까지는 400km가 넘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보다 먼 거리다. 사막 한가운데를 일직선으로 뚫고 가야 하는 길이라, 우버 대신 직접 렌터카를 끌고 나서기로 했다. 세 명 모두 운전면허는 있었지만, 상태가 안 좋은 사막 도로와 거칠기로 소문난 사우디의 운전 문화를 감안해 우리 중 가장 베테랑인 알비가 운전대를 잡았다.
황야를 가로지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차선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최고 제한 속도가 시속 120~140km에 달해 아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3차선은 대형 화물 트럭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갓길과 1차선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쏜살같이 칼치기를 하는 차들도 수두룩했다. 사우디에서는 이렇게 달려야 제시간에 도착하는 모양이었다. 베두인 전사의 후예다운 '전투적 운전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생수와 초콜릿으로 연명하며 덜컹거리는 도로를 뚫고 나아갔다.
붉은 사막에 갇히다
리야드를 벗어나자 전력 시설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도로 양옆으로 거대한 공사장 같은 황량한 사막이 펼쳐졌다. 후끈거리는 열기와 끝없이 이어지는 험한 도로. 미리 간식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금세 탈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호기로운 탐험가 3인의 방심에서 시작됐다. 건조한 들판과 낙타 목장을 지나자 마침내 곱고 붉은 모래 언덕이 솟은 사막지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고 차들이 뜸해질 무렵, 저 멀리 소형 SUV 한 대가 먼지를 휘날리며 붉은 모래언덕으로 멋지게 뛰어드는 게 아닌가? 그 차는 바퀴 자국을 남기며 유유히 사막 한복판으로 사라졌다.
"살짝 들어가서 사진 한 장만 찍고 나오자!"
찌는 듯한 날씨와 일정 때문에 사막 투어를 포기했었는데, 도로 바로 옆에 '미니 사막'이 펼쳐지니 이때다 싶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사진만 남기기로 하고 갓길로 진입한 바로 그 순간— 단단한 흙바닥인 줄 알았던 곳은 푹푹 꺼지는 모래밭이었다!
4륜 구동도 아닌 우리 렌터카의 앞바퀴는 모래를 뿜어내며 헛돌기 시작했다.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며 엑셀을 끝까지 밟아봤지만 차는 더욱 깊게 빠져들었다. 연약한(?) 여성 둘이 뒤에서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운전자를 바꿔 알비와 내가 함께 밀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등 뒤로는 붉은 해가 넘어가는 중이었고 도로에는 가로등 하나 없었다. 찌는 태양 아래 등줄기와 인중까지 울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아, 진짜 망했다. 어떡하지?'
바로 그 순간, 굉음을 내며 일제 픽업트럭 한 대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알라신이시여.종교는 없지만 정말 '신의 가호'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두건을 두르고 트럭에서 내린 '베두인 전사'는 지나가던 또 다른 트럭을 멈춰 세웠다. 두 사람은 우리 차를 구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눈치껏 파악해 보니, 나중에 온 운전자는 포기하고 가려 했으나 첫 번째 운전자가 끝까지 설득해 주신 듯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을 동원했지만, 자신들의 트럭과 우리 차를 연결해 끌어주겠다는 뜻만큼은 확실히 전달됐다. 견인 스트랩을 연결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차가 모래 구덩이에서 쑥 빠져나왔다.
하지만 진짜 난관은 이 모래 언덕을 넘어 다시 도로로 올라가는 일이었다. 베두인 전사가 직접 운전해 주겠다고 나섰지만, 운전대 정중앙을 지키던 알비는 혹시 모를 상황이 걱정되었는지 선뜻 차를 맡기지 못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사막 한복판, 여자 둘과 모든 짐이 실려 있었으니 머릿속이 하얘질 만도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직접 운전하겠다고 약간의 고집(?)을 부린 알비는…안타깝게도 다시 모래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다시 베두인 전사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가 반대 방향을 향해 풀 엑셀을 밟으며 사막을 내달릴 때(사실 이대로 끌려가는 건 아닌지 살짝 긴장했다), 차는 굉음과 함께 단숨에 모래 언덕을 솟구쳐 도로 위에 안착했다!
나와 막내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우리의 구원자 베두인 전사는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엄지를 추켜세우며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라며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무사히 도로로 올라온 뒤에도 우리의 "땡큐! 유 아 마이 히어로!" 세례에 맞춰 연신 "노 프라블럼"을 앵콜처럼 외쳐주었다.
감격스러운 인사와 '쌍따봉'을 나눈 뒤, 우리의 전사들은 모래 먼지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출장 삼총사는, 건너편 도로의 멋진 모래 언덕을 배경으로 끝내 독사진까지 차례로 남겼다. 심지어 사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아하고 예쁘게 나왔다.
결국 한 시간 가량을 허비한 끝에 무려 5시간 만에 알코바르에 도착했다. 모래 구덩이에서 탈출하자마자 해가 떨어져 캄캄한 도로를 달려야 했다. 아찔하고 위험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스릴 넘치는 경험을 한 우리는, 우리는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밤거리라도 구경하러 나갔겠지만, 큰일 치를 뻔한 여파로 모두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 외출 따위는 엄두도 내지 않고, 다들 호텔 안에서 얌전히 씻고 이불 속에 파묻혀 하루를 마무리했다.
철없지만 최고로 멋진 추억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출장단 모두 사주에 '토(土)'의 기운이 가득하다는데...역시 이건 ‘운명’이었나 보다.
스페셜티 커피, 스페셜티 CX
알코바르의 아침은 푸른 바다와 야자수가 어우러져 한결 상쾌하고 이국적이었다. 곳곳에서 관광객을 위한 호텔 부지 공사가 한창인, 성장하는 도시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우리가 방문한 '알 울라야' 상업지구는 중동 특유의 베이지색 건물과 현대식 세련된 매장, 대형 병원, 넓은 주차장과 낮은 건물들이 섞여 있어 듣던 대로 캘리포니아나 텍사스가 떠오르는 지역이었다.
한 주가 시작되는 일요일, 알코바르의 성수동이라 불리는 거리에서 사우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카프 커피 로스터스(Qaf Coffee Roasters)'를 찾았다.
이번 출장의 핵심 목적 중 하나는 사우디의 소규모 상점들이 고객과 어떻게 소통하고 디지털 접점을 형성하고 있는지 고객경험(CX) 환경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지역별로 복잡한 방언 체계를 가진 아랍어권 특유의 환경 속에서, 이들이 오프라인 현장과 온라인 채널을 어떻게 연결하고 있을지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한국인이죠? 들어올 땐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말소리를 들어보니 한국인 같았어요.”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적이었던 건 단연 현지 직원들의 고객 응대였다. 기계적인 친절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화를 건네는 진심 어린 태도였다. 계산대 앞에서 우리를 맞이한 직원은 메뉴를 고민하는 대화를 듣더니 처음으로 ‘한국’ 손님임을 알아차리고 밝게 인사했다. 동아시아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이곳에서 한국인임을 알아봐준 것이 처음이라 신기하고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한국인을 보기 힘든 알코바르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우리의 첫 사우디 여행에 대한 감상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추천 받은 커피와 프렌치토스트, 선물 꾸러미를 구매하고 있었다. 늘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CX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우리는 진심이 담긴 친절이 주는 강력한 힘을 다시 느꼈다.
커피와 디저트로 시간을 보내던 중, 문득 커피잔에 인쇄된 QR코드가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를 켜고 스캔하자 브랜드 홈페이지로 연결되었고, 메인 화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왓츠앱(WhatsApp) 채팅 버튼'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상대로 이들은 전화나 별도의 고객 관리 시스템 대신, 중동의 국민 메신저인 '왓츠앱(WhatsApp)'을 핵심 고객 접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시장에서 왓츠앱은 단순한 메신저를 넘어 일상과 비즈니스 전체를 지배하는 인프라에 가깝다. 아랍어는 지역이나 출신에 따라 방언 차이가 심해 낯선 사람과의 전화 통화 시 의사소통에 오해가 생기기 쉽고, 이에 따라 현지에서는 전화 통화 자체를 꽤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소통 방식으로 여긴다. 공공기관의 민원 창구부터 작은 로컬 상점까지 모든 문의와 비즈니스가 왓츠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소상공인 입장에서도 복잡한 응대 솔루션을 따로 도입할 필요 없이, 손님들이 이미 하루 종일 켜두고 쓰는 왓츠앱을 공식 창구로 터놓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다. 문의부터 방문 피드백까지 손님은 익숙한 메신저로 편하게 남기고, 매장은 기록을 확인하며 텍스트로 명확하게 응대하는 구조가 일상적으로 정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느낀 따뜻한 스킨십과 메신저 중심의 가벼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현지 상점의 자연스러운 일상 동선 속에서, 우리가 다듬어 나갈 사우디 맞춤형 CX 솔루션의 명확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중동 상식 한 조각] 사우디에서 카드 쓸 수 있을까?
현금 쓸 일이 거의 없다. 사우디는 자체 데빗카드 결제망인 '마다(Mada)'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어, 길거리 작은 매장부터 대형 쇼핑몰까지 전부 비접촉(Tap)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
해외 여행객 역시 VISA, MasterCard 신용카드나 트래블월렛, 그리고 Mada 망과 연동되는 애플페이(Apple Pay)를 단말기에 뼏치기만(Tap) 하면 순식간에 결제된다. 환전해 간 달러는 손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들고 왔다.
페르시아만의 미지근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알코바르를 뒤로하고, 중동의 미래와 활기찬 비즈니스 현장이 기다리는 리야드로 다시 향한다.
현지를 대표하는 대기업과의 미팅부터 사우디 왕조의 뿌리 디리야 유적지 탐방까지. 새로운 기회와 당당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던 마지막 여정의 이야기는 4부에서 계속된다.